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자파힛 제국 (문단 편집) === 제국의 소멸 === 드막에게 얻어맞은 채 극도로 약화된 마자파힛의 잔존 세력은 완전히 무력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멸망하기까지 드막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에 불과했다. 마자파힛의 잔존 세력은 드막의 새로운 군주 '트릉가나'(재위 1521-1546)의 원정으로 더 쪼그라들다가 1527년[* 종종 1527년을 마자파힛의 최종 멸망 시점으로 잡는데, 이는 자바 측 기록 《바밧 상칼라》등에 따른 것이다. 이 연대기는 1527년 투반과 다하의 잔존 마자파힛 세력이 드막에 흡수되었다고 기록했다.] 전후 트릉가나의 마지막 원정으로 완전히 드막에 흡수된다. 1520년대 마자파힛의 군주 또는 실권자가 누구인지는 불명확하다. 1517년 이후에도 마자파힛 잔당의 일부, 특히 투반[* 자바 북동부의 항구. 투반의 영주 일가는 일찍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지만, 마자파힛 중앙정계와 복잡한 혈연 관계망을 형성하였으므로 라자사 황가에 여전히 충성하였다. 《동방지》에 따르면 1510년대 초 투반의 무슬림 영주는 '''파트 비라'''(Pate Vira, [[포르투갈어]]식 표기로 '파티 위라' 정도에 대응함)였다. 파트 비라는 마자파힛군을 지휘하며 당시 드막 산하에 있었던 그레식(Gresik)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이 마자파힛의 그레식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등의 세력이 자바 중·동부에 남아 있었고, 라덴 파타의 드막 세력권을 계승한 군주들이 계속해서 이들을 공격하였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들 중 그 누구도 마자파힛의 후계자로 정통성 있는 군주를 세워 '마자파힛'의 후계 세력을 자칭할 능력이나 의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바 측 기록은 마자파힛 잔당의 소멸을 1527년으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미 자바 중부 및 동부의 정치 중심지는 1517년 이후 드막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항해에서 살아남은 [[안토니오 피가페타]]는 세계 일주를 하며 남긴 기록에서, 1522년 시점에 드막의 군주 우누스(Pati Unus, 재위 1518~1521)가 1521년 사망했으며, 그는 기존 마자파힛의 영토를 통치하고 있었다고 썼다. 이것은 피가페타 본인이 자바에 체류하며 본 것이 아니라 선원들에게 들은 간접 정보가 직접 출처이므로 정확성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를 통해 외부인이 관찰하기에 1520년대 초에는 이미 마자파힛 잔당이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1510년대 및 1520년대 마자파힛 잔당(다하/투반 정권)의 역사는 기록 부족 및 상충으로 상당히 불명확하다. 그러나 자바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사료 및 인도네시아의 이슬람 성인 전승 등을 종합해 보면 마자파힛과 드막의 말기 전쟁사를 약간 재구성해볼 수 있다. 《히카얏 하사누딘》등의 기록을 따르면 다음과 같다. 1524년에 마자파힛과 드막의 전쟁이 벌어졌는데, 드막의 [[이맘]]이자 드막 원정군을 이끌었던 장군 수난 응우둥은 마자파힛 편에 선 라덴 파타의 동복동생 트룽 공작(adipati Terung) 라덴 쿠센[* 라덴 쿠센 역시 무슬림이었으나 마자파힛에 충성하였던 장군이다.]에 의해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했다. 수난 응우둥의 아들 수난 쿠두스(Sunan Kudus)[*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하여 드막 대성원의 이맘이기도 했다.]가 지휘한 1527년의 원정에서 드막군은 승리를 거두어 최종적으로 마자파힛을 멸망시켰고, 라덴 쿠센은 이번에도 마자파힛 편에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배하였다. 수난 쿠두스는 포로로 잡힌 적장 라덴 쿠센을 경의를 표하며 융숭히 대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바밧 드막》이나 《바밧 마자파힛》 등의 지역 연대기(babad)에 따르면 수난 응우둥과 라덴 쿠센의 전투와 수난 응우둥의 전사는 1520년대가 아니라 50년 전인 1470년대, 부자 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한다. 앞서 소개한 《히카얏 하사누딘》에 등장하는 마자파힛과의 전쟁에서 1524년에 사망한 드막 대성원의 이맘은 정확히는 '라마툴라 공'으로, 일반적으로는 수난 응우둥과 동일시되지만, 행적이 유사한 다른 장군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한편, 수난 응우둥의 아들인 수난 쿠두스는 이슬람 성인으로서 어느 정도 전설적인 인물이기는 하지만, 사실 마자파힛과의 전쟁보다 드막 대성원의 이맘이자 드막 군주의 고문으로서 16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의 행적[* 가령 므나라 쿠두스 성원(Masjid Menara Kudus) 건축 등.]이 유명한 인물이다. 《[[바밧 타나 자위]]》에 따르면 드막의 마지막 군주 아랴 프낭상이 권좌에 오르기 전에 수난 쿠두스의 지지를 받는 등, 수난 쿠두스가 적어도 16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살아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대 인물의 일반적인 수명을 고려할 때, 16세기 전반에 수난 쿠두스가 마자파힛과 드막 간의 전쟁을 종결지은 장군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수난 응우둥=라마툴라 공'일 경우 《히카얏 하사누딘》의 기록도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기는 하다. 마자파힛 최후의 거점이 어디였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최후까지 마자파힛이 투반, 다하 및 중부 자바 일부를 보유하며 다하를 수도로 유지하다가 다하가 점령됨으로써 멸망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최종적으로 투반만이 구 마자파힛 잔당의 거점으로 남아 있었다가 투반이 점령됨으로써 마자파힛이 멸망했다는 설이다. 확실한 건 1510년대 이후의 마자파힛 제국은 소규모 잔존 단체 수준으로 몰락한 채 남아있다가 이슬람 세력에게 자연스럽게 흡수되면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후의 자바 지역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득세하였으며, 동부의 블람방안 왕국을 제외하면 힌두-불교계 세력의 입지는 사라지게 된다.[* 그나마 [[발리섬|발리]]에는 힌두-불교계 세력들이 남아있었다. 마자파힛 최후의 귀족들이 이슬람의 침투를 피하기 위해 동쪽 발리 섬까지 넘어가 세력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래서 발리 섬을 마자파힛 제국의 문화를 가장 짙게 보존한 섬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드막 술탄국이 트릉가나 시대에 사실상 마자파힛의 계승 세력으로서 자바 전역과 수마트라 동부, 보르네오 남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했지만, 트릉가나 사후 드막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동남아를 주름잡는 대세력으로서의 드막 술탄국은 결국 계승 분쟁과 내분으로 채 100년을 못 가고 16세기 중반에 허망하게 붕괴하였으며, 이후에는 반튼 술탄국, 치르본 술탄국, 파장 왕국, 칼리냐맛 왕국, 수라바야 공국 등으로 자바 각지가 쪼개졌고 이외에도 수많은 도시가 저마다 독립성을 주장했다. 긴 분열의 끝에 드막 술탄국의 후계 세력 가운데 [[마타람 술탄국]](1587-1755)이 자바의 패권을 획득하고 자바를 거의 통일하는 데까지는 갔으나, 마자파힛이 세력을 확장하였던 14세기와는 달리 지방 세력과 유럽 세력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마자파힛과 같은 수준의 해양제국으로는 성장하지 못하고 결국 [[네덜란드]]에 종속되기에 이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